‘기혼 캐릭터로 BL을 하는 게 찝찝해요’ 그건 자기 자신에게 너무 엄격한 것 / 카레자와 카오루의 창작상담

글/ 카레자와 카오루
기혼 캐릭터의 BL에 대하여
‘카오루 님은 어찌하셨나요!’
저도 카오루 님이고 제가 항상 어딘가 이상한 사람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지만, 이건 제 얘기가 아니라 중학생 시절 어떤 인기 소년 만화의 BL 동인지와 만나버렸을 때 느낀 감상이에요.
여담이지만, 예전에는 서점에서 ‘내가 좋아하는 만화다! 그런데 표지 그림체가 좀 다른데?’ 싶어서 샀더니 알고 보니 상업 동인 앤솔로지였고 그렇게 BL이라는 존재를 강제로 알게 되는 사고가 꽤 잦았어요.
원작에서는 주인공이 결국 히로인과 결혼해서 공식 커플이 되지만, 그 앤솔로지 안에서는 주인공이 다른 남성 캐릭터랑 연애 관계인 거예요.
BL 자체에 거부감은 없었지만, 이 둘이 열심히 사랑을 나누고 있는 동안 히로인은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애초에 여기 히로인 집 아니야? 남의 집에서 너무 편한 거 아냐? 라며 원작 히로인이 마치 존재하지 않는 듯 전개되는 세계관에 꽤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나요.
그 현상의 수수께끼를 풀고 싶어서 아마존 같은 데로 날아가고 싶었지만, 당시엔 그런 편리한 도구가 없어서 저는 그저 좀 더 큰 서점에 갈 때마다 앤솔로지를 사 모으며, 중학생 주제에 완벽한 연구 태세로 몰입했죠.
그리고 마치 퀴리 부인이 방사능에 과하게 노출된 것처럼 단기간에 공식 커플의 히로인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남캐끼리 이어지는 현상을 잔뜩 흡수한 끝에 ‘아, 여긴 그냥 그런 세계구나. 오히려 공식 남녀 커플을 좋아하는 내가 소수파일 수도 있겠는데?’라는 깨달음에 이르게 되었어요.
창작이란 나에게 유리한 세계를 만드는 일
애초에 2차 창작이라는 범주 안에서 본다면 공식에서 금지 성명을 낸 게 아닌 이상 모든 게 회색지대예요. 공식 커플이면 오프화이트고, 기혼 커플 중 한 명을 데려와서 만든 BL이면 이 세상의 어둠을 녹여 만든 블랙이라는 식으로 분류되는 것도 아니고요.
원작 존중파의 비판도 하나의 의견일 뿐이지 꼭 따라야 할 규칙은 아니에요.
그런 의견을 흘려보내지 못하고 오히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정말 공감돼요’라며 맞장구까지 치고 나서 아예 창작을 못 하게 되어버린 상태라면 너무 스스로를 억누르는 거라고 생각해요.
요즘 불륜에 대한 사회적 경각심은 굉장히 높아졌고, 한순간에 TV 화면에서 사라지고 수년째 복귀조차 못 하고 있는 유명인들도 많아요. 그런 기준으로 보면, 자기가 좋아하는 캐릭터를 다목적 화장실 불륜남 급으로 떨어뜨리는 건 말도 안 된다고 느끼는 것도 당연해요.
그걸 피하려면 공식 커플 자체가 아예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세계관을 그리는 수밖에 없는데, 그건 원작을 너무 크게 비트는 거라 꺼려진다는 말은 한마디로 말해서 스스로에게 너무 엄격한 태도가 아닐까요?
법이나 윤리를 지켜야 하고, 남의 의견을 무시해서는 안 되고, 설정 간의 논리도 모순 없이 맞춰야 한다는 등 현실의 엄격한 규칙을 창작에까지 똑같이 적용해서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너무 고지식한 자세예요.
오히려 그런 현실의 엄격함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몇 안 되는 공간이 바로 우리 머릿속, 그리고 픽션이라는 세계 아닐까요?
창작은 ‘나한테 유리한 세계’를 써도 되는 일이에요. 아니, 오히려 그렇게 쓴 게 독자 입장에서도 더 편하고 즐거울 수 있어요.
최애 커플 창작을 보러 왔는데 등장하지도 않는 공식 커플의 상대가 이 세계관에서 어떤 입장인지 장황하게 설명을 듣는다면 오히려 당황스러울 테고, 오히려 ‘그 캐릭터 이름은 꺼내지 말아줘…’ 하며 독자에게 죄책감을 안기게 될 수도 있어요.
커플명을 명시한 시점에서 별다른 설명 없이 그냥 그 둘은 연애 중인 걸로 진행해도 괜찮고요. 정말 걱정된다면 ‘여기엔 없지만 공식 커플 상대도 자기 인생 잘 살고 있음’, ‘이 가정은 폴리아모리를 인정함’ 같은 식으로 알아서 머릿속에서 보충해 달라는 투로 내버려둬도 되겠죠.
‘그렇게 모든 게 탁 맞아떨어지는 생기는 설정이 어딨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실제로 갑자기 등장한 말도 안 되는 설정들도 다들 흔쾌히 받아들이잖아요. 욕먹는 건 설정이 아니라 재미가 없기 때문이고, 오히려 설정도 내용도 재미있다면 그 누구보다 더 환영받을걸요.
당신이 만든 당신에게 유리한 세계를 불편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걸 바라며 기다리는 사람도 분명 있을 거예요. 그러니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그 세계를 세상에 꺼내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요?
먼저 ‘나에게 좋은 세계’를 만들어 보자
저도 자기 전에 머릿속으로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를 상상하곤 하는데, 그럴 때마다 ‘이거 누가 보면 진짜 죽어버릴지도 몰라’ 싶을 정도로 민망할 때가 있어요. 그래서 그런 생각을 그냥 머리에서 그대로 꺼내기보다는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창작물로 다시 한번 정리해서 생각해 보는 단계는 꼭 필요한 것 같아요.
요즘엔 ‘픽션이라고 해서 뭐든 써도 되는 거냐’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잖아요. 아무리 픽션이 현실보다 자유롭다고 해도 머릿속만큼 완전한 무법지대는 이 세상에 없어요. 그러니 그걸 굳이 꺼내서 다른 사람의 취향이나 현실의 윤리 기준에 따라 평가받기보다는 차라리 머릿속에서만 몰래 즐기는 방법도 있어요.
다만 당신은 머릿속에서조차 ‘이 세계관에서 공식 커플은 어떻게 됐을까’를 계속 조정하느라 정작 좋아하는 커플 이야기에 제대로 진입도 못 하고 결국 생각하다 잠드는 타입일 것 같거든요. 그러니까 우선은 좀 더 ‘나에게 좋은 세계’를 마음속에 그려보는 연습부터 해보는 게 어떨까요?

이 시리즈가 단행본으로!
인기 시리즈 ‘카레자와 카오루의 창작 상담’이 ‘오타쿠의 즐거운 창작론’(문학춘추 출판)이라는 제목으로 단행본화 되었습니다!
‘원작을 무시한 2차 창작이 걱정돼요’, ‘마이너 장르라 독자들이 별로 없어요’, ‘40대면 동인 행사 그만둬야 할까요?’, ‘최애를 죽이고 마는 모순과 고뇌’ 등 인기 상담은 물론 신작에 대한 고민까지 담겨 있습니다.



카레자와 선생님, 안녕하세요. 저는 최근 새로운 장르에 빠진 지 얼마 안 된 동인녀인데요. IF 세계관을 상상하는 데에서 오는 죄책감이나, 주변 팬들과의 온도 차이 때문에 고민하고 있어요.
많은 작품에서 메인 이야기와는 별개로 연애 요소가 종종 들어가곤 하잖아요. 저도 원작을 차근차근 따라가는 과정에서 제 최애 커플의 남자 캐릭터들이 이런저런 일 끝에 전원 기혼자가 되어버렸어요.
당연히 원작은 절대적인 것이고, 해석이 다르다는 말조차도 넘지 말아야 할 선이라는 걸 알고 있어요. ‘최애를 불륜남으로 만들지 마라’라거나 ‘그의 아내나 여자 친구 존재는 대체 뭐냐’는 비판도 정말 그럴싸하고요. 그렇기에 제가 할 수 있는 건, 제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IF 세계관을 창조하는 것뿐이에요. 공식 파트너를 만나지 않았거나, 만났더라도 결국 각자의 길을 걷는 선택을 하거나…. 최종적으로는 최애 커플만으로 이야기가 완결되는 그런 세계관이죠.
하지만 위에서 말한 그런 비판이나 같은 팬덤 내에서 '원작 존중'을 외치는 팬들의 의견을 접할 때마다 ‘내가 동인녀가 되지 않았다면 좋았을 텐데’와 ‘이 커플이 보고 싶어, 창작하고 싶어’라는 욕망 사이에서 자책과 갈망이 계속 충돌해요.
이런 괴로움과 도대체 어떻게 마주하면 좋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