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금을 그릴 때마다 죄책감을 느껴요’ 2차 창작에서 죄책감은 아주 중요하다 / 카레자와 카오루의 창작상담

글/ 카레자와 카오루
나 혼자만 꾸금을 그리는 것에 대한 죄책감
장르랑 커플 이름이 궁금해서 내용이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는 고민이 또 왔군요.
이번 고민도 5번이나 다시 읽어봤네요. 앞으로는 고민 마지막에 저한테만 살짝 장르를 알려주지 않으면 무시하기로 결심했으니 모두 양해 부탁드려요.
먼저 창작물을 세상에 내보이는 것 자체가 머릿속의 망상을 굳이 남에게 보여주는 노출 행위잖아요. ‘기계적으로 내 몸을 보여줬을 뿐 딱히 감정은 없다’고 변명하는 노출증 환자가 별로 없는 것처럼 아무런 감정 기복 없이 창작물을 공개하는 사람도 거의 없지 않을까요?
특히 2차 창작은 내 성적 판타지가 듬뿍 담긴 나만의 19금 신분증이나 다름없으니 민망하거나 주저하지 않는 게 오히려 위험하다고 생각해요.
이런 저 역시 아직도 제가 쓴 글을 공개할 때는 일말의 수치심과 불안감이 있답니다.
나중에 ‘나는 왜 그렇게 일론 머스크를 욕했을까?’하고 후회하다가도 또다시 일론 머스크에게 화를 내고, 또 후회하는 상황이 반복되면서 밤을 지새우는 날도 있죠.
하지만 제가 일론 머스크 까기에 빠져있을 때 전혀 즐겁지 않다고 한다면 그건 거짓말일걸요.
역시 크리에이터로서 스스로 자극적이라고 생각하는 걸 만드는 순간이 즐겁지 않을 수가 없고, 그걸 나만이 만들 수 있다면 더더욱 그렇겠죠.
내가 만들어낸 모든 것이 ‘온리원’이면서 ‘넘버원’, 즉 유일무이 최강자가 될 수 있는 건 동지가 아무도 없는 무인도 장르의 장점이라고 할 수 있어요.
나밖에 없다는 고독감이나 ‘여기가 내가 살기 좋은 동네일까?’ 같은 불안감은 물론 있겠죠. 하지만, 대도시는 치안도 나쁜 데다가 마치 자신을 Ver.9까지 업그레이드한 것 같은 고레벨들이 득실득실해요. 오히려 그곳에서도 ‘여기에 내가 있어도 될까’라는 고독감을 느낄 때가 있죠.
‘죄책감’이 오히려 흥분감을 자극한다
게다가 아네하타 시톤의 예를 들고 있는 시점부터 이미 그 ‘죄책감’이 창작을 하면서 느끼는 흥분을 더 자극하고 있다는 걸 본인도 느끼고 있는 거 아닌가요?
법으로 인정된 파트너와 IKEA 담요 속에서 안정적으로 사랑을 나누는 것 보다 당장이라도 BL의 수가 잡아먹힐 것만 같은 뒷골목에서 처음 보는 상대랑 원나잇을 하는 게 더 흥분된다는 건 자주 하는 얘기잖아요.
아네하타 시톤이 말 그대로 승천한 것도 그 행위가 비윤리적이라는 설정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아네하타 시톤이 동물과 그렇고 그런 짓을 하면서도 아무런 죄책감이 없었다면, 사슴한테 한 발 뺀(?) 후 ‘이런 거였군’하고 현자 모드가 되어 몸에 새긴 암호 지도를 기계적으로 지워 주인공 앞길이 망해버리는 만화사에 길이 남을 패배의 역사를 남겼을지도 모르죠.
당신이 창작을 하면서 느끼는 쾌감도 그러한 비윤리에 대한 죄책감과 세트로 작용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아요. 그 죄책감을 극복해 버린다면 창작 활동 자체가 ‘록밴드 마릴린 맨슨에서 마릴린 맨슨이 탈퇴’한 것 처럼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상태가 되지 않을까요?
음식 취향이 사람마다 천차만별이듯 창작의 즐거움도 다 제각각이랍니다.
카라멜 마키아토를 좋아하는 사람처럼 인기 장르의 올캐러(전원인 경우는 잘 없지만)의 훈훈한 개그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딘가에는 당신처럼 아무도 파지 않는 커플의 19금을 만드는 사람도 있겠죠. 마치 오전부터 소주에 위스키를 말아서 폭탄주를 마셔야 맛을 느낄 수 있는 것처럼 말이에요.
기왕 그런 입맛으로 태어나서 갑자기 취향을 바꿀 수도 창작을 그만둘 수도 없는 거라면, 정신 건강을 크게 해치지 않는 선에서 소주와 위스키의 조합을 즐겨보는 건 어떨까요?
2차 창작에서 ‘죄책감’을 느끼는 건 중요하다
그리고 골든 카무이 얘기가 나온 김에 말하자면, 오랫동안 자신이 결여된 인간이라 생각해 왔던 오가타도 마지막 순간에 억눌린 감정이 폭발하며 여러 주마등처럼 지나간 끝에 마침내 자신에게도 죄책감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죠. 그 사실에 만족하며 마지막 순간을 맞이한 게 아닐까 싶어요.
이렇게 해석한다면 죄책감이란 결국 사람에게 없어선 안될 감정이에요. 그러니 존재조차 불분명한 캐릭터들을 엮어서 어마어마한 19금을 만들며 죄책감을 느낄 때마다 ‘오늘도 난 결여되지 않았군’하고 기뻐해야 하지 않을까요?
실제로 2차 창작에서 ‘죄책감’을 가지는 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이름도 소재도 불분명한 캐릭터들의 19금 장면을 그리는 데 하루 종일 매달린다고 해서 수치심을 느낄 필요는 전혀 없지만, 어디까지나 남의 캐릭터를 빌려 쓰고 있다는 사실은 19금이든 아니든 마찬가지랍니다.
본질적으로 모두 캐릭터를 무단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고, 원작자가 그 상황을 눈감아주고 있을 뿐이죠. 그 죄책감과 겸허함을 싹 잊고 ‘다른 사람의 미성년 캐릭터의 19금을 모두에게 공개하는 게 뭐 어때서?’라는 자세로 나온다면 저작권자도 더 이상 눈을 감아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분노해서 아예 장르 자체를 공중분해 시킬 수도 있을 거예요.
그러니 자신의 작품이 자칫 잘못하면 크게 질타받을 수도 있다는 위기감을 가지고, 만일 질타받게 된다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릎 꿇고 사죄하는 마음으로 2차 창작에 임하는 건 좋은 자세라고 생각해요.
물론 같은 커뮤니티 사람들에게마저 이상하게 보일까 봐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죠. 어릴 적 손오공이나 뽀롱뽀롱 뽀로로를 두고 19금 망상을 펼치고, 지금도 19금에 환장하는 사람들조차 ‘이 캐릭터는 꾸금같은 거 안 했으면 좋겠는데~’라는 말을 할 때가 있으니까요. 그러니 분명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건 어느 장르나 마찬가지예요.
그리고 그런 무인도에서 피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꽃에 용기를 얻는 사람도 분명히 있을걸요?
저는 그런 꽃을 정말 좋아하고, 그렇기 때문에 매번 마이너 장르에 계신 분들이 고민 상담을 하면서 장르명을 밝히지 않을 때마다 분통이 터져요.
당신은 결코 이상한 것을 좋아하는 게 아니예요.
오타쿠라면 누구든 언젠가는 자신만의 무인도에 표류할 수 있으니까요.
그 섬에서 살고 싶어도 무인도라는 사실에 지레 겁먹고 다시 도시로 도망치는 사람도 있겠죠.
그럴 때 언젠가 보았던 무인도에서 씩씩하게 자라던 한 송이의 꽃을 떠올린다면 ‘나도 여기서 피어 봐도 되지 않을까?’라는 용기가 솟아오를 거예요.
아네하타 시톤이 신비한 감명을 선사하고 떠난 것처럼 당신이 신기루×환각 같은 커플을 만들어 고군분투하는 모습에 감동하는 사람도 분명 있을 테니까요.

이 시리즈가 단행본으로!
인기 시리즈 ‘카레자와 카오루의 창작 상담’이 ‘오타쿠의 즐거운 창작론’(문학춘추 출판)라는 제목으로 단행본화 되었습니다!
‘원작을 무시한 2차 창작이 걱정돼요’, ‘마이너 장르라 독자들이 별로 없어요’, ‘40대면 동인 행사 그만둬야 할까요?’, ‘최애를 죽이고 마는 모순과 고뇌’ 등 인기 상담은 물론 신작에 대한 고민까지 담겨 있습니다.



현재 제가 활동하는 장르는 지명도도 높고 이름만 들으면 ‘예전에 나도 팠었지’, ‘그립네~’라고 할 정도로 폭넓은 세대에게 사랑받는 리듬 게임이에요. 이 장르는 2차 창작을 할 정도로 캐릭터 정보량이 많지 않아서, 그림을 그린다고 하면 대부분 놀라고들 해요. SNS에서도 게임 자체를 순수하게 좋아하는 팬들은 많지만, 있지도 않은 캐릭터 설정을 만들어내서 혼자 흥분하고 동인 활동을 하는 동지들은 별로 없거든요. 그래서 늘 죄책감을 느끼면서 팬아트를 만들고 있죠.
이런 상황에서 안 그래도 정보도 별로 없는 캐릭터들, 심지어 원작에선 전혀 관련도 없고 서로 이름도 모를뿐더러 서로 같은 세상에 살고 있는지도 모르는 캐릭터들의 관계성을 멋대로 만들어내서 꾸금을 그리는 것에 푹 빠졌어요. 정말 하루 종일 미친듯이 그림만 그리고 있죠. 그리고 그 열정을 다 쏟고 나면 어마어마한 죄책감이 밀려들어서 종이를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 싶을 정도예요. 마치 제가 아네하타 시톤(‘골든 카무이’에 등장하는 캐릭터로 동물을 지나치게 사랑(?)하는 어마어마한 변태이다.)이 된 기분이랄까요. 제 그림 자체는 유치한데 그 장르와는 너무 맞지 않는 거죠. 제가 활동하는 장르엔 순수한 팬들이 많고 나만 최애의 꾸금을 그리고 있는 것만 같아요. 이 죄책감을 어떻게 해야 좋을까요? 답변 부탁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