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워서 꾸금 묘사를 못 하겠어요’ 부끄러움을 버리는 것도 재능 / 카레자와 카오루의 창작상담

글/ 카레자와 카오루
부끄러워서 꾸금 묘사를 못 하겠어요
‘딱히 그리고 싶은 건 없어요’
제 신작 회의는 항상 이 한마디에서 시작돼요. 그런데 만약, 인기도, 매출도, 무엇보다 실력도 전부 무시하고 그냥 그리고 싶은 걸 마음껏 그려도 된다고 한다면 저는 바로 땅을 치며 ‘꾸금 러브코미디를 그리고 싶어요……!’라며 울부짖을 것 같아요.
그 정도면 그냥 그리면 될 텐데, 애초에 재미있게 그릴 자신도 없고, 기술적으로도 버겁다는 핑계를 매번 늘어놓으면서 결국은 '부끄러워서 못 그리겠어'라는 결론으로 돌아가죠.
작가 본인이 부끄러워하면서 그린 꾸금이라니, 이건 마치 노래방에서 ‘이건 연습이야’라는 의문의 변명을 꼭 덧붙이면서 노래 부르는 사람 같달까요. 보는 입장에선 더 민망할 수도 있어요.
그럴 바엔 ‘애초에 그런 건 세상에 내놓지 않는 게 낫지, 그냥 흑역사 하나 추가될 뿐이야’라는 결론에 다다르고 매번 포기하게 돼요.
하지만 자연계에 존재하지도 않는 의성어를 마구 써가며, ‘성대에서 그런 소리가 날 수 있다고?!’ 싶은 수준의 신음 소리가 나오는 씬을 그리는 사람들이 전혀 부끄러움이 없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겠죠.
물론 애초에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처음엔 수치심이라는 리미터와 싸우게 되고, 그걸 해제하고 가속 페달을 끝까지 밟아낸 사람들만이 지금의 꾸금 그랑프리에서 톱 레이서로 활약하고 있는 거겠죠. 창작이라는 세계에선 ‘부끄러움이 없다’, ‘수치심을 버릴 수 있다’는 곧 ‘재능이 있다’라는 뜻이에요.
그런 의미에서 보면, 우리에겐 꾸금을 그릴 재능이 없는 걸지도 몰라요.
하지만 ‘어디까지 부끄러움을 버릴 수 있는가’는 사람마다 달라요.
저는 에세이 관련 작업도 많이 하는데, 작품에 쓰는 내용들은 과장은 있어도 거의 실제로 있었던 일이거나 제가 실제로 느낀 생각들이에요.
‘나는 비실존 인물 간의 평면적인 섹X는 얼마든 그릴 수 있지만, 내 프라이버시와 머릿속을 여기까지 까 보이는 건 부끄러워서 못 하겠어’라고 느끼는 꾸금 탑 레이서도 있을 거예요. 어쩌면 우리 쪽이야말로 하반신은 완전히 드러내놓고선, 머리 모양이 이상하면 부끄러워하는 진짜 변태처럼 보이고 있을지도 몰라요.
당신도 꾸금 리미터를 해제할 재능은 없을지 몰라요. 그렇지만 ‘어떻게 이런 우울한 전개를 쓰지?’, ‘제대로 보기 힘들 정도로 감정선이 세다’는 얘기를 듣는 등, 어딘가에서는 리미터가 날아가 있는 부분도 있을 거예요. 그렇다면 리밋이 걸린 채로 어중간한 꾸금을 쓰느니, 차라리 ‘제대로 쓸 수 있는’ 장르나 방향을 더 살려보는 게 낫지 않을까요?
그 작품이 누군가에게는 ‘나로선 절대 쓰지 못하는 걸 써줘서 고마워’라는 의미가 될 수도 있으니까요.
하반신을 드러낸 사람끼리 ‘너 부끄럽지도 않냐’라며 서로 찡그려보는 게 아니라 ‘내가 못 보여줄 걸 대신 보여줘서 고마워’라며 어깨동무할 수 있는 게 바로 창작의 세계예요. 그리고 애초에 창작을 하고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창작하지 않는 사람 눈에는 ‘나는 못 하는 걸 대신 해줘서 고마워’ 같은 존재일지도 몰라요.
‘언젠간 쓰겠지’라는 마음은 버리지 말 것
그렇다고 해서 ‘재능이 없으니, 꾸금은 포기하세요’라는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니에요.
꾸금을 쓸 재능이 없는 게 아니라 ‘꾸금 리미터 해제’에 시간이 좀 걸리고 있는 거라면, 언젠간 풀릴 가능성도 있거든요.
다만, 그 해제 능력 자체가 부족해서 그 ‘언젠가’가 ‘노년기’일 수도 있죠.
실제로 어느 만화 잡지 편집자에 따르면, 신인 만화상 응모자 중에는 퇴직 연령을 훌쩍 넘은 사람들도 꽤 많다고 해요. 그리고 그들 작품의 주요 내용은 ‘내가 생각하는 최고의 여자/남자와 꾸금을 하게 되는 이야기’라고 하더라고요.
매달 그런 걸 봐야 하는 심사자 입장에선 고통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죽기 전에 억눌렀던 걸 해방했다’라고 생각하면, 꽤 희망적인 일 아닐까요? 설령 끝까지 남은 게 성욕뿐이었다고 해도, 성희롱 노인이 되는 대신, ‘창작’이라고 하는 누군가를 기쁘게 할 수 있는 형태로 승화시켰다는 건 대단한 일이에요.
쓰고 싶은데 쓸 수 없는 답답한 날들이 당분간은 계속되겠지만, ‘언젠간 쓰고 말 거야’라는 마음만큼은 절대 버리지 말아요. 오히려 쓰고 싶은 게 금방 사라지는 것보다, 쓰고 싶은 것이 계속 남아 있는 상태가 취미로서도 훨씬 오래갈 수 있을 거예요.
물론, 혹자는 ‘하고 싶은 걸 노년의 즐거움으로 미루면, 정작 그 시기가 와도 기력도 체력도 없어서 못 한다’고 하기도 하죠. 하지만 창작은 나이가 들어도 비교적 계속할 수 있다는 게 강점이에요.
저 역시 아직 꾸금 러브코미디를 포기하진 않았고, 지금은 무리일지 몰라도 언젠가 꼭 그려볼 생각이에요. ‘이걸로 연재하고 싶어요’ 하면서 들고 가면 편집부 쪽은 질색할지도 모르지만요. 하지만, 그땐 이미 부끄러워만 하다가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나이일 테니 멈출 수 없을 거예요.
언젠가 수명이 부끄러움을 넘어서는 순간이 찾아오겠죠. 그날을 기대하면서 기다려보자고요.

이 시리즈가 단행본으로!
인기 시리즈 ‘카레자와 카오루의 창작 상담’이 ‘오타쿠의 즐거운 창작론’(문학춘추 출판)이라는 제목으로 단행본화 되었습니다!
‘원작을 무시한 2차 창작이 걱정돼요’, ‘마이너 장르라 독자들이 별로 없어요’, ‘40대면 동인 행사 그만둬야 할까요?’, ‘최애를 죽이고 마는 모순과 고뇌’ 등 인기 상담은 물론 신작에 대한 고민까지 담겨 있습니다.



항상 칼럼이 올라올 때마다 즐겁게 읽고 있어요. 저는 2차 창작(BL)을 쓰는 글러인데, 창작을 시작한 지는 아직 2년밖에 안 됐어요. 그런데 꾸금 묘사를 잘 못 쓰겠다는 점이 고민이에요. 물론 그런 전개 자체를 싫어하는 건 아니에요. 제가 읽을 땐 어떤 종류의 신음이 튀어나오든 간에 다 즐겁게 읽을 수 있거든요. 근데 막상 제가 직접 쓰려고 하면 너무 부끄러워서, 도저히 다시 읽어볼 수가 없어요.
너무 이성이 남아 있어서 그런가 싶어서, 야근이나 술 마시고 좀 맛이 갔을 때(!) 써보기도 했거든요. 그런데 오타랑 맞춤법 확인, 퇴고는 결국 다음 날의 정신 차린 내가 하게 되잖아요. 게다가 저는 글 쓰는 건 좋아하지만, 내가 쓴 글에 과몰입은 못 하는 타입의 오타쿠거든요. 그냥 평범한 일상적인 글도 퇴고는 잘 못 하는 편이라, 순간의 기세로 쓴 그쪽 묘사들은 도저히 못 보겠어요.
‘그럼 그냥 안 쓰면 되잖아’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만, 침대에 들어가기 전까지의 과정은 너무 좋아해요! 사후 묘사로 얼버무리는 게 아니라, 제대로 된 본편 씬을 써보고 싶다는 욕망도 있고요. 이런 부끄러움을 어떻게 다뤄야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