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은 일러스트보다 인기가 없다…’ 어차피 해야 한다면 열등감을 원동력으로 바꿔보자 / 카레자와 카오루의 창작상담

글/ 카레자와 카오루
소설보다 주목받는 일러스트에 대한 열등감
창작에는 질투나 열등감, 부러움이 따라붙기 마련이에요. 차를 사면 당연히 핸들이랑 타이어가 따라오는 것처럼 말이죠. ‘이거 없이 납품하면 안 되나요?’라고 물어도 ‘달릴 생각 있냐?’라는 대답만 돌아올걸요.
그래서 차체만 집에 모셔두고 아무에게도 안 보여주면서 광만 내는, 일명 아웃사이더 아트 쪽으로 빠지는 사람도 있지만… 그건 정말 소수의 경우예요.
멋진 차를 손에 넣었다면 당연히 pixiv 고속도로 같은 곳을 달려보고 싶어져요. 직접 달려보면, 지나가다 손 흔들어주거나 하트를 날려주는 사람을 만날 수도 있고요. ‘와, 차 뽑고 달려보길 잘했다’ 하고 생각하게 되는 순간이 분명 생길 거예요.
하지만 바로 옆 차선 트렁크에 좋아요와 북마크가 쏟아질 듯 실려 있고, 조수석엔 미네 후지코 같은 여자를 태운 차가 시속 300km로 질주하죠. 결국 그 차의 배기가스에 절규하는 것도 창작이에요.
우선, 질투나 열등감 같은 감정은 애초에 없앨 수도, 완전히 극복할 수도 없다는 걸 인정해요. 좋은 의미에서 ‘항복’하는 거죠.
이런 감정들은 굉장히 거치적거리는 위치에 자리 잡은 기둥 같은 거예요. 지나다가 머리나 새끼발가락을 자주 부딪쳐서 괴롭긴 하지만, 이게 없으면 창작이라는 집을 세울 수가 없어요. 결국엔 최대한 덜 부딪히게 피하거나, 부딪혔을 때 얼마나 빨리 아픔을 가라앉힐 수 있느냐가 관건이죠.
‘어쩔 수 없지’ 하고 받아들이고, 오히려 이 질투와 열등감이 나의 창작을 떠받치는 기둥이라고 생각해 보는 것도 좋아요. 어떤 부정적인 감정도 ‘이게 창작의 원동력이 됐어요’라고 말할 수 있는 게 창작의 멋진 점이니까요.
특히 여러 복잡한 감정 중에서도 ‘소설을 쓰는 사람이 만화나 일러스트에 느끼는 찜찜한 감정’은 그중에서도 그 정도가 크죠. 너무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오히려 그냥 생각 자체를 멈춰버리는 게 좋을 정도예요.
실제로 이 창작 고민 칼럼에 들어오는 사연 중에서도 소설이 외면받는 현실이나 그에 대한 슬픔을 다룬 내용이 많아요. 또, 그게 메인 고민이 아닌 사연에서도 ‘제가 소설을 쓰는 사람이라…’ 라는 한 줄에 모든 감정이 담겨 있고, ‘역시 소설 쓰는 사람은 한 문장에 많은 걸 담는구나’ 하며 감탄하게 되기도 해요.
만화나 일러스트가 소설보다 눈길을 끌기 쉽고, 숫자도 잘 나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에요. 그렇다고 해서 그게 개인의 실력이 부족해서도 아니고, 소설이라는 매체가 무력해서도 아니에요. 결국 그 차이는 상대의 엉덩이 냄새만으로도 판단이 가능한 갓댕댕이 님들과 달리, 거의 시각 정보에만 의존해서 사는 인간이라는 하등 생물의 한계 때문이에요.
즉, 당신이 인간을 창조한 신 같은 존재가 아니라면 굳이 만화와 소설의 차이에 열등감을 느낄 필요는 없어요.
만약 당신이 진짜 인간을 만든 신이라면? 그땐 정말 ‘창작 센스가 없다’고 단언할 수 있을 것 같네요.
팔다리 4개에 손가락이 열 개씩이나 달린 외형부터가 너무 징그럽고, 스스로 ‘노동’이나 ‘창작’ 같은 문화를 만들어놓고는 그걸로 괴로워하고 있으니 말이에요. 지금이라도 은퇴해야 할 수준이지만, 아마도 당신은 신이 아니겠죠.
‘노력이 부족해서 못 하는 거야’는 결국 제자리걸음일 뿐
하지만 ‘소설보다는 그림이 훨씬 주목받기 쉽다’는 반박 불가능한 현실을 알고 있다면, 결국 ‘그럼 너도 그림을 그리면 되잖아’라는 말로 흘러가고 말아요. 그런데 정작 그걸 못 하겠고, 해보려 해도 노력조차 하지 않고, 결국 ‘이 모든 건 재능 핑계 대면서 노력 안 한 내 잘못이야’라는 결론에 다다르니까 더 괴로운 거겠죠.
사실 저도 지금 당장 미국에 가서 오타니 선수보다 더 많은 홈런을 치면 전 세계의 찬사를 받고 어마어마한 부를 얻을 수 있다는 걸 알고는 있지만, 그걸 못 하겠는걸요.
못 하는 건 ‘노력 부족’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노력만 하면 나도 가능하다’는 말이 되기도 해요. 겉으로는 겸손해 보이지만, 사실은 자기 자신에 대한 기대가 지나치게 크다는 뜻일지도 모르죠. ‘난 아직 안 했을 뿐이야’라고 현실을 회피하는 방식이기도 하고요.
‘노력이 부족해서 못 했어’라는 결론만 내리고 그냥 우울해지는 건, 겉보기엔 자기를 반성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 자리에서 멈춘 거나 다름없어요. 오히려 ‘못하는 건 못 하는 거야’라고 과감히 던져버리고,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는 쪽이 훨씬 더 앞을 향해가는 거라고 할 수 있겠죠.
당신도 못 그리는 그림에 연연하기보다는 쓸 수 있는 글에 집중해 보는 건 어때요? 이러나저러나 질투나 열등감을 느껴야 한다면, 같은 장르 안에서 자신보다 더 주목받고 있는 다른 작가들을 향해 느끼는 편이 훨씬 낫죠.
글 쓰는 사람에게 느끼는 질투는, 오히려 창작의 원동력이 되기도 해요. 하지만 그림은 그리지도 않고 그릴 생각도 없는데, 잘나가는 그림쟁이랑 자신을 비교하며 괴로워하는 건, 생일이 같다는 이유 하나로 위인과 자신을 비교해 자괴감에 빠지는 것처럼 큰 의미는 없는 일이에요.
적더라도 읽어주는 사람은 있다
물론 표현 방식은 다르지만, pixiv나 행사 같은 무대 위에 올라서면 숫자라는 형태로 그 차이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되다 보니 비교하지 말라는 건 사실상 무리일 수 있어요.
그렇지만 저는 글을 쓰는 분들이 자기 자신을 그렇게까지 깎아내리지는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확실히 숫자만 놓고 보면, 글보다는 그림 쪽이 더 주목받기 쉬운 경향이 있어요. 하지만 글을 즐기고, 꾸준히 지켜보는 사람은 분명히 존재해요. 저도 푹 빠진 커플링이 생기면 그림이든 글이든 똑같이 찾아보는 편이고, 소설 동인지도 자주 사거든요.
분명 독자들이 존재하는데도 ‘아무도 안 봐준다’, ‘충분히 주목받지 못한다’는 말만 반복하게 되면, 읽고 있는 사람 입장에서는 ‘내가 남긴 좋아요 안 보여? 이렇게 가까이에 있는데?’라며 크게 실망하게 될걸요.
누구나 글을 썼다면 더 많은 사람이 봐주기를 바라기 마련이고, 글보다 더 많은 주목을 받기 쉬운 그림에 대해 열등감을 완전히 없애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죠. 그렇지만 그 마음을 계속 말로 내뱉다 보면, 결국 ‘그럼 너도 그리든가’라는 무한 루프에 빠지게 돼요. 그 전에 어디선가 흐름을 끊고, 자신의 글을 읽어주는 독자들을 바라보며 써나가는 수밖에 없어요.
그리고 당신은 그림을 못 그리니까 ‘그림만 그릴 수 있다면’이라고 생각하는 걸지도 모르겠지만,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라고 해서 글을 쓰는 사람보다 우월하다고 느낀다거나, 마음이 편한 것도 아니에요. 자신보다 잘 그리는 사람을 보며 질투하고, ‘나도 더 잘 그리고 싶은데’라는 열등감을 느끼는 경우도 정말 많아요. 글을 잘 못 쓰는 걸 고민하는 사람도 물론 있고요.
인간은 시각 중심의 하등한 생물이기 때문에, 그림이 더 주목받기 쉬운 건 맞아요. 하지만 반대로 섬네일만 보고 ‘이 사람은 그림 못 그리네, 패스’하고 무자비하게 판단 당하기도 하죠. ‘남의 떡이 더 커 보인다’는 말처럼 원래 다른 쪽이 더 좋아 보이지만… 가끔은 옆 동네 지옥이 훨씬 더 끔찍한 경우도 있어요.
어차피 그곳은 그곳일 뿐이니 우리는 각자의 지옥에서 계속 싸워나가 봐요.

이 시리즈가 단행본으로!
인기 시리즈 ‘카레자와 카오루의 창작 상담’이 ‘오타쿠의 즐거운 창작론’(문학춘추 출판)이라는 제목으로 단행본화 되었습니다!
‘원작을 무시한 2차 창작이 걱정돼요’, ‘마이너 장르라 독자들이 별로 없어요’, ‘40대면 동인 행사 그만둬야 할까요?’, ‘최애를 죽이고 마는 모순과 고뇌’ 등 인기 상담은 물론 신작에 대한 고민까지 담겨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