뼈아프게 반성한 ‘담당 편집자에게 들은 잊을 수 없는 한마디’ / 이소후라본 히지키의 이야기

글/ 이소후라본 히지키
이번에 ‘이소후라본 히지키의 이야기’라는 칼럼을 연재하게 되었다.
이소후라본 히키지의 이야기고 자시고 간에 일단 내가 누구인지 궁금하신 분들도 계실 것이다.
간단하게 내 소개를 하자면 나는 6년 정도 아이돌 개그 만화를 연재하고 있는 만화가로, 정식 펜네임은 ‘이소후라본 히지키’이다. 참으로 이상한 이름이 아닐 수 없다.
본업은 만화가지만 사람들은 나를 ‘가끔 RT에서 보이는 고민 상담 해주는 사람’ 정도로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약 6년 전 감상평이나 교류를 위해 익명 메시지 툴을 설치했는데, 설치한 지 몇 달 만에 어째서인지 ‘이런 사람한텐 어떻게 말해야 하죠?’, ‘이럴 때 히지키 님은 어떻게 하세요?’ 같은 세상의 온갖 고민들이 모여들게 된 것이다.
한가하기도 했고 기껏 날 찾아줬으니 답변이라도 해줘야겠다고 하는 사이에 어느덧 나는 ‘고민 상담을 해주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뭐, 인터넷에선 뭐든 한 번 대답해 주면 ‘대답해 주는 사람’ 취급을 받기 십상이니까.
그런고로 이 칼럼에서도 ‘히지키 님이라면 어떠실지 이야기를 들려주세요’라는 타이틀에 맞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가고자 한다.
담당 편집자에게 들은 잊을 수 없는 한마디
첫 번째 테마는 ‘담당자에게 들은 잊을 수 없는 한마디가 있나요?’이다.
출판사에 만화를 보내거나 만화 공모전을 통해 데뷔했거나 여러 매체에서 연재하고 계신 분들이라면 담당 편집자가 여러 명 있는 경우도 드물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첫 담당 편집자와 지금까지 2인 3각으로 일을 계속하고 있다.
참고로 처음으로 담당 편집자와 연락을 주고받은 건 pixiv의 다이렉트 메시지였다. 내가 지금도 담당 편집자와 즐겁게 지내고 있는 건 모두 pixiv 덕분이다.(갑분 칭찬 모드)
이렇게나 사이가 좋지만, 사실(딱히 비밀도 아니지만) 연재가 중단된 적이 있다. 비즈니스적인 이유였지만 우리는 작품에 대한 강한 자신감이 있었기에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완결이 아니라 1부 완결’이라고 우기기로 했다. 실제론 그렇게 말하면서도 마지못해 차기작 얘기를 시작했지만….
하지만 독자분들의 열렬한 응원 덕분에 놀랍게도 연재가 부활하게 되었다. 정말 과장이 아니라 ‘2부가 있으면 좋겠네….’ 정도로 생각했던 ‘1부 완결’이 만들어낸 기적이었다. 나와 담당 편집자는 신이 나서 2부 구성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나는 연재가 중단되기 전에 그리고 싶었지만 스토리를 위해 나중으로 묵혀둔 스토리를 몇 가지 얘기했다. 담당 편집자는 너무 좋다며 그 이야기를 흥미롭게 듣다가 돌연 ‘그 에피소드는 언제 그릴 계획이에요?’라고 물었다.
내가 우물쭈물 ‘일단 연재 부활 첫 화에는 이 에피소드를 해야 하니까 좀 더 나중에…’ 라고 대답했더니 편집자는 딱 잘라 ‘히지키 씨, 그리고 싶은 건 바로 그려야 해요’라고 하는 것이다.
나는 충격을 받았고 뼈저리게 반성했다. 연재를 중단하게 되면서 급하게 얘기를 정리해야 하는 상황에 몰리면서 이것저것 잘라내는 일을 겪으면서 정작 그리고 싶은 이야기는 ‘지금이 아니라 나중에’ 하며 미루고 있었던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작품에 대한 열정이 변한다
생각해 보면 머릿속에만 있고 쓰고는(혹은 그리고는) 싶지만 ‘지금은 아냐’, ‘음, 조만간…’하며 미뤄둔 것이 얼마나 더 있을까.
딱히 상업 연재뿐 아니라 2차 창작에서도 초안 그대로 잠들어 있는 데이터가 몇 개 떠오른다. 대개는 윤곽만 있거나 나조차도 해독할 수 없는 콘티 상태, 혹은 머릿속에 결정적인 하이라이트만 그려놓은 단계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도 폴더에 거름처럼 묵혀놓은 알 수 없는 데이터나 망상의 조각처럼 짚이는 데가 있지 않은가. 막연하게 ‘지금은 아니야’라고 생각하는 것들 말이다.
하지만 목청껏 말하고 싶다. ‘지금’ 써야(그려야) 한다.
2차 창작물 서랍에 처박힌 거름이 귀찮은 이유는 시간이 지나면 작품에 대한 열의(광기라도도 한다)가 바뀔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처음엔 ‘A는 B의 가문을 대대로 섬기는 메이드의 후예인데, B는 그런 A에게 호감이 있는 거지! 꺄하핫!’하면서 흥분하더라도 나중에 기억을 되살려보면 ‘내가 뭘 얘기하려는 거지?’ 싶을 때가 종종 있다. 하지만 독자 입장에서는 작가가 흥분하여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탈고한 작품에서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역동감, 에너지, 매력이 느껴진다.
‘좀 더 그림 실력이 늘었을 때 그리고 싶은데… 지금은 시간도 없고….’라는 변명은 나도 자주 내뱉지만 잘 생각해 보면 내 그림 실력은 10대 때보다는 나아졌지만 20대가 되면서 상당히 정체된 상태이다. 즉, 지금 그리든 나중에 그리든 큰 차이가 없다는 말이다.
‘그거 그리고 싶은데…’라고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것도 나쁘진 않지만 쇠뿔도 단김에, 망치를 휘두를 에너지와 광기와 기회가 있을 때 빼도록 하자.
담당 편집자의 말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급하지도 않은 취미 낙서를 대량으로 만들어 내곤 한다. (편집자한테 사과해….)

